• twitter
  • facebook
出版部

近藤剛著『日本高麗関係史』要旨(日本語・ハングル)

곤도 쓰요시(近藤剛) 저 『일본고려관계사』 요지

저자는 졸업논문 이후 일본과 고려의 관계사에 대해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 동안 대한민국 고려대학교에 교환 유학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국의 연구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파악하여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를 바탕으로 일본·고려 관계사 연구의 과제로 다음 4점을 들고자 한다.

① 일본·고려 관계사 연구 성과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본 대(對)고려 관계사」연구이다. 즉, 일본사 연구자에 의한 연구 성과가 대부분인 것이다. 한편, 고려의 국내외 상황을 감안하여 대일 교류의 목적과 의의를 해명하는 「고려에서 본 대(對)일본 관계사」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연구에서는 고려와 중국 여러 왕조(송, 요[거란], 금[여진], 몽골)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해한 후 「고려 외교 채널 중 하나로서의 일본」이라는 시점을 가지는 것을 중요시한다.

② 이 책이 다루는 10~13세기 전반 시기의 관련 사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지적된 바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12세기에 관해서는 개별적, 구체적 연구조차 거의 전무하다. 그 때문에 일본·고려 관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영세한 사료를 망라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해독해왔는가를 감안하면, 아직 연구할 여지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③ 종래에는 국가 간의 정치적 관계가 없었다는 이유로 인해 관계사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근년 주목 받고 있는 「해역 아시아사」라는 시각을 통해, 특히 경계 영역 사람들의 교류와 그 교류가 국가간 문제로까지 파급된 배경을 탐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양국 관계사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④ 일본사 연구자의 고려사 그 자체에 대한 이해 및 한국의 연구에 대한 검토, 반대로 한국인 연구자의 일본사 그 자체에 대한 이해 및 일본의 연구에 대한 검토가 반드시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다. 또, 특히 일본사 시기 구분에서 고려시대사는 고대와 중세에 걸쳐있기 때문에 연구가 세분화된 오늘날에는 연구자 및 연구에 적지 않은 단절이 있어 일본·고려 관계사 연구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위에 제시한 문제점의 극복을 위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이 책을 집필하였다.

A. 고려 측의 시점, 즉 고려의 국내 사정과 대외 관계 전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고려·일본 관계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일본·고려 관계사를 고찰했다. 구체적인 연구 방법으로는, 일본에 남아있는 고려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牒状)를 분석했다. 논의에서 핵심적인 사료는 가능한 한 원본·원석·사본을 수집하여 본문교정을 하고, 그 후에 세밀한 해독을 추가해왔다. 이 분석 시각은 문제점 ①, ②를 극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B. 국가 간 교류에만 주목하는데 그치지 않고, 쓰시마 도민을 비롯한 규슈 북부지역과 고려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 영역의 사람들이 국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라는 해역사 연구와도 중첩되는 시점을 통해 고찰을 추가하였다.
이 분석시각은 문제점 ③을 극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C. 한국 유학을 경험한 것을 계기로 지속적으로 한국의 연구 성과를 수집하여 파악하고 있다.
이 분석시각은 문제점 ④를 극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상의 문제 의식, 분석 시각에 입각하여 이 책은 서장·종장 외에 논문 2부 8편 및 칼럼 2개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고려의 외교문서 및 제도와 대외관계」에서는 11~13세기 일본·고려 관계사를 검토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사료를 재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연구가 뒤떨어져있던 고려의 외교문서 양식과 관직사, 그리고 대 일본 외교 안건에 관한 문서 행정 시스템에 대해 고찰한다. 또, 고려의 대외 관계에 관한 새로운 식견도 포함시켰다.

제1장 「『대일본국 대재부완 고려국 예빈성 첩장(大日本国大宰府宛高麗国礼賓省牒状)』에 보이는 고려의 대일본인식」에서는 1079년 고려 국왕 문종이 병 때문에 일본에 의사 파견을 요청한 사건에 대해 검토한다. 이 사건은 비교적 연구가 축적되어있는 테마이지만 고려가 발급한 외교문서의 서명 부분에 관한 언급은 전무하였다. 그래서 국문학연구자료관이 소장한 사본에서 본문을 확정한 후에 검토하여 고려와 일본의 위상에 대해 명확히 함과 동시에, 고려가 의사를 일본에 파견한 이유를 고려를 둘러싼 국제 정세로부터 고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결과 청의일건(請医一件)의 배경에는, 문종조에 태조 이래 만들어져 온 여러 제도가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팔관회에 여진, 탐라, 송 상인 등과 함께 일본인도 참가하는 등 고려의 자존 의식이 충족되었다는 사실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에 내항하는 송 상인을 통해 송과의 국교가 회복되자, 일본과의 관계도 교역을 위해 고려에 방문하고 있던 왕측정(王則貞)을 통하여 개선하려고 시도하였다. 일본측도 당초에는 의사 파견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파견하였는데 효과가 없을 경우 수치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 후에는 소극적인 의견이 대세가 되어 의사 파견을 보류하였다. 그 때 문제가 된 것이 예빈성 첩장(礼賓省牒状)이었다. 문서의 모두 및 말미에서는 평행, 즉 대등 관계가 나타나고 있지만, 종래 지적되고 있는 「상의하달」적인 형식과 내용뿐 아니라, 고려의 「공첩상통식(公牒相通式)」에 기초한 서명 양식의 형태에서도 고려의 자존 의식과 일본에 대하여 상위에 있고 싶어하는 고려의 대(對)일본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제2장 「『일본국 대마도완 고려국 금주 방어사 첩장(日本国対馬島宛高麗国金州防禦使牒状)』의 고문서학적 검토와 『염찰사(廉察使)』」에서는 궁내청 서릉부와 국립공문서관을 비롯한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1206년에 쓰시마 섬에 발급된 고려첩장 사본을 수집하여 교정하였다. 그리고 대일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고려사』 백관지에 기재된 바가 없었던 「염찰사」의 실태에 육박하여, 염찰사가 「안찰사(按察使)」임을 해명하였다.

제3장 「『이문탁 묘지(李文鐸墓誌)』를 통해 본 12세기 중반의 고려·금 관계」에서는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문탁 묘지」의 원석을 조사하여 얻은 번각문을 바탕으로, 12세기 중반 고려와 금의 관계를 기축으로 한 북동아시아의 상황을 고찰했다. 그 결과 12세기 중반 금 해릉왕(海陵王)의 남송 정벌에 따른 혼란기에 금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거란인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정보가 있었음에도, 정확한 정보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파견하는 등의 고려 외교 정책을 실무 관료인 이문탁의 묘지에서 발견하였다.

제4장 「고려의 대(對) 일본 외교 관리 제도」에서는 고려가 발급하여 일본으로 보낸 여러 외교문서와 관련 사료를 이용하여, 대일 외교 안건이 고려 국내의 어떤 기관에 어떤 문서로 전달되고 결정 사항이 어떻게 일본에 전해졌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논했다. 고려의 대일 거점이었던 금주(金州)를 방문한 일본인에 대한 대응 방식과, 그들의 정보가 어떻게 고려 조정에 전달되고 그 처우를 심의・판단하였는가와 같은 고려의 대 일본 외교 관리 제도에 대해 규명하였다.

제2부 「일본·고려 간 이른바 『진봉선(進奉船)』의 연구」에서는 제1부에 이어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까지의 일본·고려 관계사를 규명하였다. 해당 시기는 사료적 제약이 특히 클 뿐 아니라 일본사에서는 고대와 중세에 걸친 시기에 해당하여 연구의 단절이 나타나고 있다. 또 몽골 습래 이전의 일본·고려 관계사에서 중요한 테마임에도 연구가 심화되지 않고 있던 이른바 「진봉선」의 역사상을 해명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제1장 「12세기 전후의 쓰시마 섬과 일본·고려 관계」에서는 일본·고려 쌍방의 대외 관계사료임이 인지되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대괴비초(大槐秘抄)』와 「이문탁 묘지(李文鐸墓誌)」가 서로 관련된 것임을 밝히고, 1160년 쓰시마 도민이 고려에 구속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더욱이 『대괴비초』에 보이는 「제(制)」에 따라 안정적·정기적으로 쓰시마 도민이 왕래하는 상황에 대응하여 고려 측에서는 이를 「정기적인 진봉(進奉)」이라고 생각하고, 이른바 「진봉지례(進奉之礼)」·「진봉예제(進奉礼制)」를 쓰시마 도민에게 부과한 것이 아닌가 상정하였다.

제2장 「13세기 전후의 쓰시마 섬과 일본·고려 관계」에서는 중세, 즉 무가 사회의 성립에 따라 쓰시마 섬의 도정 운영에 변화가 발생했음을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쓰시마 도아(島衙) 내부의 대립, 즉 무가 정권의 성립이라는 새로운 사태로 인하여 등장한 대재부사(大宰府使)나 수호인(守護人[무토 스케요리【武藤資頼】])이 쓰시마의 재청 관인 아비루(阿比留) 씨에 대해 간섭하여 쓰시마·고려 간 진봉에 영향을 준 결과, 고려로부터 교류를 거부당하는 상황이 발생했음을 지적했다. 이에 덧붙여 조큐의 난(承久の乱)의 영향이 1220년대의 초창기 왜구를 발생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논했다. 제3장, 제4장에서 취급한 가로쿠(嘉禄) 3년(1227)의 일본·고려 교섭에서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 무토 스케요리는 쓰시마 섬의 악도 90명을 참수하고 「수호호시(修好互市)」를 요청하는 답서를 고려사 승존(承存)에게 주어 귀국시켰는데, 이에 관해서도 스케요리가 고려 교역의 주도권을 쥐고 싶어했다는 점과 13세기 초두 이래 계속 대립하고 있던 아비루 씨 세력의 삭감 등을 목적으로 했을 가능성도 있음을 지적했다.

제3장 「가로쿠(嘉禄) 3년 일본을 방문한 고려사에 대하여 -「가록삼년고려국첩장사단간급안문(嘉禄三年高麗国牒状写断簡及按文)」의 검토-」에서는 2017년 규슈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게 된 새로운 사료 「가록삼년고려국첩장사단간급안문」을 소개하고 분석하였다. 이 사료는 13세기의 것으로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의 직필은 아니나 그 주변에서 작성된 문서이고, 1227년에 일본을 방문한 고려사 승존 일행이 규슈에 도착한 상황과 무토 스케요리와 교섭한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다자이후 현지에 있었던 인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또, 문서 모두에는 『아즈마카가미(吾妻鏡)』 깃카와본(吉川本) 에 실려있는 「전라주도안찰사첩장(全羅州道按察使牒状)」 중에서 추출한 부분의 한 줄이 남아있기 때문에 『아즈마카가미』의 편찬 의도에 관한 견해도 서술하였다.

제4장「가로쿠・안테이(安貞)(고려 고종대)의 일본・고려 교섭과 「진봉정약(進奉定約)」」에서는 13세기 전반에 고려 내부에서 문제가 되었던 초창기 왜구의 단속을 요구하기 위해 고려사가 일본을 방문했는데 종래에는 한 번의 교섭이 이루어졌다고 여겨지고 있었지만, 같은 해 두 번에 걸쳐 고려사가 일본을 방문하여 「진봉정약」을 맺기에 이른 교섭 과정을 밝혔다. 또 그러한 「정약(定約)」을 체결한 이유는, 당시 고려가 북방 거란인의 습격과 동진국의 성립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북로남왜(北虜南倭)」였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한 것임을 밝혔다.

칼럼에서는 「국서」나 「외교」에 대한 사고 방식 및 비교 무인 정권론 연구에 관한 현재의 도달점을 제시했다.

이 책에서 도출된 결론은 일본·고려 관계사는 물론 고려 대외 관계사, 고려 관직사, 고려 고문서학 등 고려사 그 자체에도 기여하고 있다. 나아가 경계 영역 사람들의 동향에 주목한 해역 아시아사 연구와 관련된 성과도 올릴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